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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진료해주신 채**입니다.
이름 : 현필목안과

아홉 살 때 양안 시력이 0.2에 불과했던 저는, 매해 시력이 악화되어 삼십 대 초반이 될 무렵에는 안경없이 밥도 제대로 못 먹을 만큼 심한 근시였습니다. 눈이 잘 보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별 탈없이 잘 움직여 주는 착한 몸을 감사하기보다 그 빠진 한가지가 어찌 그리 아쉽던지, 안경을 벗어보는 것이 소원이라면 소원이었지요. 밝은 눈에 대한 소망이 간절했던 만큼, 근시교정 수술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당장이라도 수술실로 달려가고 싶어 조바심을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H 안과는 제가 라식수술을 위한 진료상담을 처음 받은 병원입니다. 그리고 단 한번의 상담을 받고 그대로 그곳에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몸이 천냥이면 눈이 구백냥이라는 말도 있지만 눈에 문제가 생기면 치명적인 영향을 입을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렇게 쉽게 수술을 결정했던 것은, 제가 찾았던 병원의 H 원장님이 너무나 친절하고 자상하게, 그리고 진솔하게 상담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H 원장님은 처음 저에게 라식 수술을 적극적으로 권하지 않았습니다. 법률가들은 눈을 혹사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수술을 하더라도 근시가 재발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고, 라식수술을 하면 근시안의 최대 장점인 노안 지연 효과가 사라져서 40대 초반만 되어도 노안이 올 것인데, 이미 30대 중반이 가까운 저로서는 건강한 눈을 유지할 시간이 길지 않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H원장님의 이런 설명들은, 밝은 세상을 맨 눈으로 보고 싶었던 간절한 제 소망을 잠재우는데 별 역할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한 시간 가까이 수술의 장단점을 솔직하고 자상하게 설명해준 H원장님을 신뢰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뿐이지요. 그래서 저는 다른 병원을 더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H원장님을 하느님처럼 믿고 이 분에게 눈을 맡겼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수술실에서 나와 처음 병원의 하얀 벽을 보았을 때, 걸려있던 시계의 두 바늘이 또렷하게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전 10시가 조금 못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순간 가슴이 뭉클하고 콧등이 찌릿했습니다. 시계를 읽을 줄 알게 되었을 무렵 이미 심한 근시였던 탓에, 맨 눈으로 시계를 본 것이 난생 처음이었던 것입니다. 눈이 조금 회복되었을 때 제가 제일 처음 한 일은, H원장님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수술 후 제 눈으로 시계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눈을 뜬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군요. ……….. 어두운 세상을 헤매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빛을 주고 계시니, 선생님은 틀림없이 천당 가실 거예요…..”

그렇게 수술을 마치고, 한동안을 안경에서 해방되어 잘 살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해외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 공항에서 비행 스케줄을 알리는 전광판을 전혀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수술 후 5년만이었습니다.
‘올 것이 왔구나.’
수술 전에 이미 근시퇴행 현상에 관하여 H 원장님의 상세한 설명을 들은지라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5년만에 물러가 버린 밝은 세상이 슬프고 안타깝기 그지없었습니다.

귀국 후 H 원장님을 다시 찾았습니다. 이제 다시 안경에 갇혀 살게 되는구나 낙담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원장님이 재수술을 권하였습니다. 제 각막 두께가 두껍고 눈 조직이 건강해서, 한번 더 수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할 수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원장님 자신이 의료인으로서의 사명과 명예를 위해서도 꼭 다시 수술을 해주어야겠다고 적극 권하였습니다. 첫 수술을 권하지 않던 모습과는 아주 대조적이었지요. 그러나 H원장님에 대한 신뢰가 깊고 병원 가는데 꽤 용감한 저로서도 눈을 두 번씩 수술한다는 것은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이라,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H안과에서는 이후에도 원장님이 수술에 자신이 있으니 아무 염려하지 말고 재수술을 받으라는 전화가 걸려왔고, 망설임 끝에 저는 다시 H원장님에게 눈을 맡기고 수술대에 누웠습니다.

H원장님이 사명감과 명예를 걸고 해준 두 번째 수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이 수술에서 H원장님은 저에게 10원 한 장 청구하지 않았습니다. 안약 값이라도 내겠다 하였지만 한사코 사양하였습니다. 첫 수술 후 무려 5년이나 지나서, 그것도 미리 경고했던 근시 퇴행현상이 나타났는데도 한번 치료해주기로 한 환자라면 평생 책임을 지고 봐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번 내 환자는 평생 내 환자라 하였습니다. 저는 이 때 H원장님에게 감동하여, 동시대를 살아가는 전문가로 이 분에게 존경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수술을 하고 다시 6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제 눈은 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H원장님이 경고했듯이 노안까지 와서 작은 글씨들은 가까이서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수술을 한 사실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지금도 가장 잘 한 일들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11년이나 되는 세월을 밝은 눈으로 살았을 뿐 아니라, H원장님 같은 분에게 전문 직업인의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제 인생에 충분히 큰 수확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상식과 윤리를 지지하는 정의로운 법률가가 되기를 꿈꾸었고, 오늘도 정의가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만약 힘의 강약과 가진 것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것, 그런 것을 정의라 한다면, 정의란 모든 짐승이 고민 없이 순응하는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오직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이상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법칙을 이겨보겠다는 이 대담한 이상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것이기에, 애정이야말로 인간을 짐승과 구별하는 가치로서의 정의가 아닌가 합니다. 저는 전문가가 애정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을 H 원장님에게 배웠습니다. 추상적인 불의를 미워하기에 앞서 먼저 내 주변을 사랑하고 돌보는 마음, 애정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내 일을 하는 것이 정의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눈 앞에서 도움을 청하는 환자도 책임 있게 챙겨주지 못하는 의사가 질병이 없는 세상을 말한다면 위선이라 할 수 밖에 없듯이, 나에게 의지하는 의뢰인을 애정으로 챙겨주지 못하는 법률가가 정의를 말한다면 어찌 위선이 아닐까요. 저물어가는 한 해, 침침한 눈을 깜박이며 H원장님을 생각하다가, 시력은 떨어져도 정의를 보는 눈은 가슴 속에 따뜻한 불씨가 되어 살아남기를, 신년 소망으로 되뇌어 봅니다.


등록일 : 2014-11-11